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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빈의 동이열전

공빈의 동이열전에 태자 부루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하여서,

 

공빈의 동이열전을 사고전서에서 살펴봤더니 사고전서에는 없었다.

 

중국에서 우의 치수비가 나와서 묻혔다고 하는데, 과연 거기에는 태자 부루와 우의 도산 회견에 대한 내용이 나올까?

 

사실이면 동아시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기록인데, 주장을 하기에는 아직 근거가 너무 부족하다.

 

살펴봤더니 이 글이 단기(檀紀) 4283년(서기 1950년)에 경찰교양협조회(警察敎養協助會)에서 간행한 발해국 대야발(大野勃) 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164쪽 <부록>에 실려있었다고 하는데 결국 1900년대 이후 기록이라는 것이다.

 

1900년대 이후 태자 부루 도산회견에 대한 내용이 여러개 나오지만, 정작 1900년대를 앞서는 기록을 찾지 못하는 것이 너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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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빈(孔斌)이 기록하였다는 <동이열전>의 원문과 번역문 입니다. 공빈(孔斌)은 전국시대(戰國時代) 말기(약2300년전) 사람으로 위(魏)나라의 재상이었다고 합니다. 공자의 후손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공빈(孔斌)은 일반책에서 찾기가 어려운데 그것은 그가 젊은 시절의 공겸(孔謙)이라는 이름을 노년에 공빈(孔斌)으로 고쳤기 때문입니다. (史記 참고)

東夷列傳 全文

東 夷 列 傳 (註 檀奇古史 附錄)

東方有古國 名曰東夷
星分箕尾 地接鮮白
始有神人 檀君 遂應九夷之推戴而爲君 與堯병立
虞舜 生於東夷 而入中國 爲天子至治 卓冠百王
紫府仙人 有通之學 過人之智 黃帝受內皇文於門下 代炎帝而爲帝,
小連大連 善居喪 三日不怠 三年憂 吾先夫子稱之,
夏禹塗山會 夫婁親臨 而定國界,
有爲子 以天生聖人 英名洋溢乎中國 伊尹受業於門 而爲殷湯之賢相
其國雖大 不自驕矜 其兵雖强 不侵人國,
風俗淳厚 行者讓路 食者推飯 男女異處 而不同席 可謂東方禮儀之君子國也,
是故 殷太師箕子有不臣於周朝之心 而避居於東夷地
吾先夫子 欲居東夷 而不以爲陋,

 

吾友魯仲連亦有欲踏東海之志
余亦欲居東夷之意
往年賦觀東夷使節之入國其儀容有大國人之衿度也,
東夷蓋自千有餘年以來 與吾中華 相有友邦之義 人民互相來居往住者接踵不絶,

吾先夫子 印夷不以爲陋者 其意亦在乎此也, 故余亦有感而記實情以示後人焉

魏 安釐王 十年 曲阜 孔斌 記 (字 子順)

 

동방에 오랜 나라가 있으니 이름하여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별자리 분류로는 기성(箕星)과 미성(尾星)의 방향(동북방)이며, 땅은 선백(鮮白)에 접해 있었다. 선백(鮮白)은 선비(鮮卑)


처음에 신인(神人 : 道를 통한사람) 단군(檀君)있었는데 마침내 아홉 이족(九夷) 의 추대에 응하여 임금이 되었으?요(堯)임금과 더불어 병립하였다.

순임금(虞舜)이 동이(東夷)에서 태어나서 중국에 들어와 천자가 되어 다스리기에 이르니 많은 왕들 중에서 탁월하게 뛰어난 분이셨다.

자부선인(紫府仙人 : 동이족의 선인)이 학문에 통달하고 다른 사람보다 지혜가 있으니 황제 헌원이 그에게서 공부하고 내황문을 받아와서 염제 신농씨 대신 임금이 되었다

소련과 대련(동이족으로 공자선생등이 '효경'등 에서 언급이 자주 되는 인물)이 부모의 상을 잘 치뤄 3일을 게을리 하지 않고 3년을 근심하니 나의 할아버지께서 칭찬하셨다.

하(夏)나라 우(禹)임금이 (제후들을 소집하여) 도산(塗山)에서 회맹(會盟)할 때에 부루(扶婁)께서 몸소 임하시어 나라의 경계를 정하였다.

유위자가 하늘이 낳은 성인으로 훌륭한 이름이 중국에도 넘쳐 흐르니 이윤이 그 제자로 공부해서 은나라(동이족왕조) 탕임금의 어진 재상이 되었다.

그 나라는 비록 크나 스스로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 병력은 비록 강하나 남의 나라를 침범하지 않으며, 풍속이 순후(淳厚)하여 길을 가는 사람이 양보하고 먹는 사람은 밥을 상대에게 권했었고 남녀가 처하는 곳을 달리하여 앉은자리를 함께 하지 않으니 동방예의의 군자국(東方禮儀之君子國)이라고 할 만 하다.

이런 연유로 은나라 태사(太史)였던 기자(箕子)가 주(周)나라 조정에서 신하 노릇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있어서 동이(東夷)의 땅에 피해 가서 거처하였고 우리 선대 어른(공자)께서 동이에 거처하고자 하셨으며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내 친구 노중련(魯仲連) 역시 동쪽 해안 지방을 답사할 뜻을 가지고 있고 나도 역시 동이에 거처하려는 뜻이 있었는데 왕년(往年)에 동이의 사절이 (우리나라 즉, 魏나라에) 입국하는 것을 살펴보니 그 몸가짐이 대국인(大國人)의 금도(衿度)가 있었다.

동이는 대개 천 여 년 이래로부터 우리 중화(中華)와 서로 우방의 의리가 있어서 나라 사람들이 서로 와서 거처하고 가서 사는 경우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던 것이다.

우리 선대 어른께서 동이가 누추하지 않다고 여기신 것은 그 뜻 역시 여기에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나 역시 깊이 느낀 바가 있어 이 진상을 기록함으로써 후인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bc268년) 곡부(曲阜) 공빈(孔斌)이 기록하다. (자(字), 자순(子順))

 

* 이 내용은 단기(檀紀) 4283년(서기 1950년)에 경찰교양협조회(警察敎養協助會)에서 간행한 발해국 대야발(大野勃) 저, ≪단기고사(檀奇古史)≫의 164쪽 <부록>에 실려있습니다.


홍사(鴻史)서문

위 글은 홍사(鴻史)라는 책의 서문으로 쓰여졌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즉, 단기고사(檀奇古史)에 부록(附錄)으로 실리기 전에 먼저 홍사(鴻史)라는 책의 서문으로 쓰여졌다는 것입니다.

위(魏)나라 안리왕(安釐王) 10년 (bc268년)이라는 시기까지 똑같은 것으로 봐서 단기(檀紀) 4283년(서기 1950년)에 경찰교양협조회(警察敎養協助會)에서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발행할 때 누군가 홍사(鴻史)라는 책을 참고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홍사(鴻史)는 민족역사학자 송호수박사님이 소장하고계시는 책으로 어떤분이 올바른 우리역사를 밝히는데 사용해 달라고 기증한 책이라고합니다. (저서 "한겨레의 뿌리 길" 참고)

내용은 똑같고 출전만 틀리게 동국열전(東國烈傳)으로 되어있다고합니다.